2012-2014
김성룡 작가 평론
개인전 My Ideal Masculine Beauty 문앤박갤러리, 2014
양지훈의 작품세계는 시스템 속의 남성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속의 남성들은 세계와의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조직의 광대한 네트워크에 의해 창발되는 남자들은 단백질과 영양보충제의 순환 속에서 자기 산출됨의 조건인 세포와 D N A안에 또는 의식과 근육 속에 생명의 힘과 에너지를 주입하고 있다. 몸의 내부와 외부는 존재자에게 주어진 환경이 존재에게 가하는 외적 제한을 자기 제한으로 화할 때 오는 불협화음이 있다. 아노미적 세계의 남성들은 세포와 근육의 질을 높이는 약으로 스스로를 대체시키고 있다.
양지훈의 미술수업을 한 뉴욕도 그렇고 한국세계도 그렇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지역도 영토도 문화도 다를 게 없다. 양지훈의 작품은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래서 공허하다. 그의 형상들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사색의 단면이 보이지만 다분히 동물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자신과 환경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환경을 해체하고 개선하는 의지가 없는 그의 작품 속 형상들은 마초적인 남성의 위태로운 본성에 가깝다. 조직 속의 그 신체는 생물학적이고 동물적이다. 원시적이고 고독하다. 근육들은 주먹을 쥐고 있고 우람하지만 세계의 시스템 바깥에서 소외되어있다. 여성성과 여성주의 페미니즘의 논리적 이론들이 발달하고 있는 사회에서 남성주의의 심리의 근저를 다루는 이론들은 상대적으로 약한데 양지훈의 세계는 약한 토대의 변방에서 배회하고 있다. 그래서 실존적 남성주의이지만 실존주의의 표면에서 표류하고 있다. 그는 의식의 깨달음의 지층에서 어떤 방향을 상실한 듯 보인다. 그래서 그의 형상들도 다소 고통스럽고 낮은 비명 소리만 들린다. 세계와 나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는 삶의 형태는 자기 형성적 벽을 깨뜨려야 한다. 그 너머에 문제적 삶의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충동과 고독의 향수는 허망한 겉껍질 이어서 허공에 부유하는 영혼의 노래이고 방향을 상실한 채 떠도는 유성이다. 삶과 현실의 구성 요소들은 사적인 힘과 죽음의 충동과 파괴적 본성 속에 숨어 있다.
양지훈의 형상들은 어둠 속을 점프하고 있고 수많은 약병들은 그늘 속에 놓여져 있다. 주체의 분열이고 자신의 신체의 상실된 지점에 대한 사멸적이며 죽음을 벗어나기 위한 불멸적인 무의식의 충동이 잠재되어 있다. 조각나 있거나 뭉쳐져 있는 육체들은 이 세계의 유전적 공학에서 배양한 예비 기관들의 함성들처럼 보인다. 생식 세포는 강화되고 근육이 피의 잔해를 뒤집어쓴 그 남성들은 힘쓸 것 같지만 섬약하다. 시대의 남성들의 허약한 단면이다. 언제든 허공에 사라지는 우발적 존재자들이다. 스스로의 내면에서 힘을 재생산하고 여성에 대한 주도권도 보이지만 나약한 근육이고 효과 없는 제스처이다 미술의 인식 너머에는 냉엄한 인식론과 존재론의 괴물이 가로막고 서 있다. 그 너머의 현실은 정확한 우리의 현실이다 .철학적 인식이고 바라봄의 인식이다. 양지훈이 그 세계의 창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그 숲의 영토로 들어서기를 바란다.
개인전 My Ideal Masculine Beauty 문앤박갤러리, 2014
양지훈의 작품세계는 시스템 속의 남성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속의 남성들은 세계와의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조직의 광대한 네트워크에 의해 창발되는 남자들은 단백질과 영양보충제의 순환 속에서 자기 산출됨의 조건인 세포와 D N A안에 또는 의식과 근육 속에 생명의 힘과 에너지를 주입하고 있다. 몸의 내부와 외부는 존재자에게 주어진 환경이 존재에게 가하는 외적 제한을 자기 제한으로 화할 때 오는 불협화음이 있다. 아노미적 세계의 남성들은 세포와 근육의 질을 높이는 약으로 스스로를 대체시키고 있다.
양지훈의 미술수업을 한 뉴욕도 그렇고 한국세계도 그렇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지역도 영토도 문화도 다를 게 없다. 양지훈의 작품은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래서 공허하다. 그의 형상들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사색의 단면이 보이지만 다분히 동물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자신과 환경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환경을 해체하고 개선하는 의지가 없는 그의 작품 속 형상들은 마초적인 남성의 위태로운 본성에 가깝다. 조직 속의 그 신체는 생물학적이고 동물적이다. 원시적이고 고독하다. 근육들은 주먹을 쥐고 있고 우람하지만 세계의 시스템 바깥에서 소외되어있다. 여성성과 여성주의 페미니즘의 논리적 이론들이 발달하고 있는 사회에서 남성주의의 심리의 근저를 다루는 이론들은 상대적으로 약한데 양지훈의 세계는 약한 토대의 변방에서 배회하고 있다. 그래서 실존적 남성주의이지만 실존주의의 표면에서 표류하고 있다. 그는 의식의 깨달음의 지층에서 어떤 방향을 상실한 듯 보인다. 그래서 그의 형상들도 다소 고통스럽고 낮은 비명 소리만 들린다. 세계와 나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는 삶의 형태는 자기 형성적 벽을 깨뜨려야 한다. 그 너머에 문제적 삶의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충동과 고독의 향수는 허망한 겉껍질 이어서 허공에 부유하는 영혼의 노래이고 방향을 상실한 채 떠도는 유성이다. 삶과 현실의 구성 요소들은 사적인 힘과 죽음의 충동과 파괴적 본성 속에 숨어 있다.
양지훈의 형상들은 어둠 속을 점프하고 있고 수많은 약병들은 그늘 속에 놓여져 있다. 주체의 분열이고 자신의 신체의 상실된 지점에 대한 사멸적이며 죽음을 벗어나기 위한 불멸적인 무의식의 충동이 잠재되어 있다. 조각나 있거나 뭉쳐져 있는 육체들은 이 세계의 유전적 공학에서 배양한 예비 기관들의 함성들처럼 보인다. 생식 세포는 강화되고 근육이 피의 잔해를 뒤집어쓴 그 남성들은 힘쓸 것 같지만 섬약하다. 시대의 남성들의 허약한 단면이다. 언제든 허공에 사라지는 우발적 존재자들이다. 스스로의 내면에서 힘을 재생산하고 여성에 대한 주도권도 보이지만 나약한 근육이고 효과 없는 제스처이다 미술의 인식 너머에는 냉엄한 인식론과 존재론의 괴물이 가로막고 서 있다. 그 너머의 현실은 정확한 우리의 현실이다 .철학적 인식이고 바라봄의 인식이다. 양지훈이 그 세계의 창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그 숲의 영토로 들어서기를 바란다.